
성종실록에는 일본 승려 신옥이라는 인물이 딱 한번 등장합니다. 그는 어떻게 조선에 정착했으며, 조선은 왜 그를 받아들였을까? 실록 속 이방인의 기록을 통해 조선의 선택을 들여다봅니다.
1471년 4월 12일, 《성종실록》에는 낯선 이방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일본 대마도 출신의 승려로, 19년간 조선의 산천을 유람한 끝에 조선 땅에 정착하고자 공식 요청을 올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신옥(信玉), 조선에 귀화한 향화승(向化僧)이었습니다.
1.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 일본 승려 신옥의 유입 배경
신옥은 대마도(對馬島) 출신으로, 속명은 두이다지(豆伊多知), 부친의 이름은 시라삼보라(時羅三甫羅)였습니다.
그는 12세에 출가한 후, 부친을 따라 조선의 제포(薺浦)로 입국했습니다. 그러나 부친이 병으로 사망하자 조선에 홀로 남게 되었고, 이후 웅천·창원·김해·밀양 등지에서 걸식하며 유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제포(薺浦)는 어디인가? 위치: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포동 또는 근처 연도. 역사적 역할: - 고려 말~조선 초까지 대마도와의 무역과 외교, 해상 교류의 거점 항구 - 삼포(三浦) 중 하나로, 일본과의 통상 기지 역할 수행 - 특히 세종~중종 대에 걸쳐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 상인·사신이 드나들던 곳 🔎역사적 맥락 보충 제포는 세종 3년(1421)에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을 위해 공식적으로 개방된 항구입니다. 세종 때 삼포(제포, 염포, 부산포)가 설치되며 일본인 무역을 관리했고, 신옥이 도주인 부친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시점인 세조~성종 초기에도 여전히 주요 통로였습니다. |
2. 19년간 조선을 유람한 외국인 승려
신옥은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명산과 고찰을 유람하며 풍광과 지세를 몸소 체험한 수행자였습니다.
그가 다녀간 곳은 전라도의 무등산, 월출산, 충청도의 여러 산들, 황해도의 구월산, 평안도의 향산, 함길도의 개골산, 강원도의 대산, 그리고 경상도의 지리산까지 조선 8도를 망라합니다.
예조는 그의 공초를 통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조선의 산천과 지세, 허실을 알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는 신옥이 단순한 유랑자가 아니라, 조선의 지리적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도첩을 요청하다 – 조선의 승려가 되고자 한 일본인
1471년 3월, 신옥은 서울로 올라와 조정에 도첩(度牒) 발급을 요청합니다.
도첩은 불교 억제 정책을 펴던 조선에서 제한적으로 발급하던 승려 허가증으로, 이를 받아야만 정식 승려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옥은 다음과 같이 청원합니다.
“도첩을 내려주시고, 서울 인근 산중의 절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는 외국인으로서 공식적으로 조선 불교계에 편입되기를 요청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습니다.
4. 예조의 판단 – 실용성과 정보 보안의 균형
예조는 신옥의 요청을 신중히 검토한 끝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조선 입장에서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는 이미 19년간 전국을 떠돌며 조선의 산천과 지세를 모두 파악하였다.
지금 돌려보내면, 이 정보가 외국으로 유출될 우려가 있다.”
결국 조정은 신옥에게 도첩을 발급하고, 서울 인근 절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또한 그의 거주지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정기적인 감시 체계도 함께 마련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조선이 외국인을 배척하기보다, 경계하면서도 수용했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5. 실록 속 한 번의 등장, 그리고 역사에서의 침묵
《성종실록》 10권 1471년 4월 12일자 기사에서 신옥의 공초와 처분이 기록된 후, 그의 이름은 실록에서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첩을 받은 뒤 서울 근처 절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의 생애는 역사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신옥은 실록에 단 한 번 등장하고, 영원히 사라진 인물로 남게 됩니다.
6. 신옥이라는 인물이 남긴 의미 – 실용적 포용과 이방인의 정착
신옥은 단순한 일본 출신의 향화승이 아닙니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외부인을 어떻게 판단하고 수용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 19년의 체류와 정보 축적
- 불법 체류자가 아닌 종교인으로의 편입 요청
- 도첩 발급과 정기 감시라는 제도적 수용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조선은 그를 단순한 이방인으로 보지 않고, 정보와 외교적 실리를 고려하여 '감시 가능한 체류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조선의 외교 정책이 단선적인 배척이 아닌, 실용적 판단과 제도적 포용을 병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실록 속에서 단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진 이름, 신옥.
그러나 그의 짧은 기록은 말합니다.
역사란, 이렇게 한 인물을 통해 한 나라의 원칙과 유연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