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7

경국대전만으로는 부족했다? 속록, 조선의 법을 보완한 보조 법령집

조선은 법전 하나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경국대전》이 완성된 뒤에도, 새로운 제도와 왕명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이를 보완한 기록이 바로 ‘속록(續錄)’입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법을 실제로 움직인 보조 법령집 '속록'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봅니다.1. 조선의 법전, 대체 몇 종류가 있었을까?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법전은 단연《경국대전(經國大典) 》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법은 한 번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왕이 바뀌거나, 행정 체계가 달라질 때마다 법도 같이 진화해야 했습니다.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경국대전》을 보완한 추가 법령 모음집《속록(續錄)》입니다. 2. ‘속록’이란 무엇인가? ‘속록(續錄)’은 말 그대로 ‘기록을 잇는 책’입니다. 즉, 경국대전 이후 새롭게 제정된 제도,..

사관의 메모 2025.05.16

숭은전, 세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 예종실록 속 광릉 이야기

1469년, 세조의 어진을 모신 광릉 영전이 '숭은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정치적 상징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종 실록 5권에 기록된 예종 즉위 원년 5월 16일의 한 줄을 들여다 봅니다. 1. 오늘의 실록 한 줄 📜 “광릉의 영전을 ‘숭은전’이라 부르게 하소서.”—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5월 16일(음력) 2. 1469년, 광릉의 영전을 숭은전이라 부르다 1469년 5월 16일, 양력으로 6월 14일에 이조(吏曹)에서 조정에 건의했습니다. “광릉(光陵)의 영전(影殿)을 ‘숭은전(崇恩殿)’이라 부르게 하소서.”예종은 이 요청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단 네 줄 남짓한 짧은 기록이지만, 이 속에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 위계, 정치적 상징이 고스란히..

왕량성에서 별이 흐르자, 지천사에서 법석을 열었다 - 태조실록의 기록

1397년, 왕량성에서 별이 북쪽으로 흐르자 조선은 지천사에서 불교의식을 열었습니다. 실록 속 별 하나가 말해주는 조선의 정치와 신앙을 알아봅니다. 🔹오늘의 실록 한 줄 📜 “왕량성에서 어떤 별이 나와 북쪽으로 흐르니, 지천사에서 법석 (法席)을 베풀었다.” -《태조실록》11권, 태조 6년 5월 15일 조선 태조 6년 5월 15일(양력 1397년 6월 16일), 실록에 적힌 이 한 줄은, 하늘에서 이상 징조가 포착되자 조정이 서울 도심의 사찰 ‘지천사’에서 불교 의식을 열어 재앙을 막고자 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왕량성이란? 조선이 두려워한 별자리의 의미 왕량성은 은하수 북쪽, 현재의 서양 별자리로는 카시오페이아 자리에 해당하는 고대 별자리입니다. 고대 점성술에서는 이 별에..

1547년 5월 14일 (명종 2년) - 한여름의 서리, 조선에 무슨 일이?

1547년 5월 14일 (양력 6월 28일), 조선의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습니다.그것도 경기·충청·경상·강원 등 네 개 도에 걸쳐서 말이죠. 《명종실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 오늘의 실록 한 줄 📜 “경기 지평, 충청도 단양(丹陽), 경상도 예천·영천·용궁(龍宮), 강원도 영월(寧越)에 서리가 내렸다.” – 《명종실록》5권, 명종 2년 5월 14일 (음력) 🔹 실록 날짜 * 음력: 명종 2년 5월 14일* 양력 환산: 1547년 6월 28일 즉, 여름이 한창인 6월 말에 서리가 내렸다는 말입니다. 🔹 기상 현상? 이상 기온? 서리는 보통 초봄이나 늦가을에 관측됩니다.하지만 실록에 기록된 이날은 벼가 자라고, 뽕잎을 따는 시기인 6월 말입니다.‘서리’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훈민정음은 왜 실록에 11번밖에 등장하지 않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훈민정음’이라는 단어는 고작 11번만 등장합니다. 왜 이렇게 적을까요? 기록의 관점과 조선 사관들의 인식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한글은 위대한 문자지만, 실록에선 너무 조용하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하고 백성을 위해 반포한 문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할 만큼 그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죠. 그런데 조선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훈민정음’이라는 단어가 단 11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적게 기록된 걸까요? 그 이유는 단지 무관심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사회의 구조와 문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1. 훈민정음은 ‘정통 문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은 한문 ..

사관의 메모 2025.04.23

훈민정음 반포일, 왜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 세종실록과 해례본의 차이

훈민정음 반포일은 왜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창제는 있는데 반포는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침묵의 원인을 실록의 기록 방식과 조선의 정치 속에서 찾아봅니다. 창제는 있는데 반포는 없다? 실록의 침묵을 해석하다 1443년 12월 30일(음력 기준),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한 새로운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합니다. 이 날짜는 양력으로 환산하면 1444년 1월 10일에 해당합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이 대사건은 《세종실록》에 단 한 줄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달에 임금이 언문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한글 창제"로 알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공식적으로 남긴 ..

사관의 메모 2025.04.23

1443년 (세종 25년) 12월 30일 - 훈민정음이 실록에 기록된 날

1443년 음력 12월 30일, 세종 25년의 마지막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단 한 줄의 기록이 실립니다. 바로, 세종이 백성을 위한 새 문자 ‘훈민정음’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매일 쓰는 ‘한글’의 시작은, 이렇게 실록 속 조용한 한 문장으로 등장합니다. 🔹 오늘의 실록 한 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 실록 기록 ✔️ 날짜: 세종 25년 12월 30일 (양력 1444년 1월 10일)✔️ 위치: 《세종실록》 제102권 🔹 실록에 언급된 훈민정음 창제 기록 원문 (현대어 해석)“ 이달에 임금이 직접언문(백성을 위한 글자) 28자를 지었는데, 이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 전서체 글자)를 본떠 만들었으며, 초성(初聲)·중성(中聲)·..

대보를 받은 뒤에야 진짜 왕이 된다? 조선 왕권의 상징, 대보 이야기

조선 시대 국왕은 즉위했다고 곧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대보라는 상징을 받는 순간에야 비로소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1. 대보란 무엇인가?  ‘대보(大寶)’는 조선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國璽) 또는 어보(御寶)를 상징적으로 이르는 표현입니다. 실제 인장 그 자체보다는, 왕권을 공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와 상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위식에서 새로운 국왕은 ‘대보’를 받는 의식을 치르게 되며, 이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대보를 받는 순간, 새 국왕은 비로소 ‘진짜 왕’이 되는 것입니다.  2. 실록이 보여주는 ‘대보’의 상징성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표현을 보면, 이 ‘대보’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연산군의..

사관의 메모 2025.04.12

상소, 상차로 본 조선 간언 제도 | 조선은 왜 말 대신 글로 정치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얼핏 볼 땐 대화같지만, 자세히 보면 글을 통해 오가는 내용을 적어 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조선 시대에는 왕에게 간언할 때, 글로 상소(上疏)나 상차(上箚)를 올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상소와 상차, 그리고 대간의 간언 제도를 통해 조선의 정치가 어떻게 문서로 운영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1. 조선의 간언 제도란? 상소와 상차, 구언의 차이를 중심으로 조선은 임금의 잘못이나 잘못된 정치를 신하가 바로잡도록 한, ‘간언(諫言)’ 제도를 갖춘 나라였습니다. '왕에게 바른말을 하는 것'을 단순한 '충돌'이나 '대립'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공식 제도화된 충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 조선 대간(사헌부,..

사관의 메모 2025.04.11

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 연산군 2년 Day3 - 끝나지 않는 윤채 사건, 그리고 중이 되어버리는 백성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2년 1월 3일자 기록입니다. 대간과 대신들이 다시 윤채와 정진의 처벌을 요청하지만,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백성들이 왜 중이 되는지를 고민하며, 군역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모습도 드러납니다.   1. 연산군 2년 Day3 – 윤채 사건, 끝없는 갈등.... 그리고 백성을 걱정하는 왕 1월 3일 실록에는 세 가지 주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먼저, 어제에 이어 윤채와 정진의 처벌 문제를 두고 조정이 다시 술렁입니다.그리고 연산군은 백성들이 왜 중이 되는가를 고민하며, 군역 제도의 문제를 짚습니다.마지막으로, 계속 간언이 묵살되자 대간이 아예 사직까지 청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죠.과연 연산군은 이 간절한 목소리에 응답했을까요? 이날 실록, 한 줄씩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

실록 정주행 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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