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 이름은 익숙하지만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누가 썼고, 어떻게 남겼을까요?
왕도 못 봤다는데 진짜일까요? 오타는 없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묻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모아봤습니다.
1. 조선왕조실록, 진짜 다 알고 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사서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본이 남아있는 공식 실록이며, 페이지 수로 따지면 분량도 세계 최대입니다. 왕도 직접 볼 수 없었고, 철저한 기록 시스템 덕분에 세계사에 유례없는 공식 사서로 평가받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청난 역사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사실 전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식을 주고받는 사이트에 가보니 실록에 관해 생각지도 못했던 궁금증들이 많더군요. 와, 이런 것도 궁금해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왕조실록도 사람이 만든 기록이다보니 완벽할 수 없을 테고, 그 속에 있는 의외의 빈틈이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질문들을 정리해보고,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실록의 제작 과정과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
과연 조선왕조실록에도 오타가 있을까? 사라진 기록은 없을까? 왕도 못 봤다면, 대체 누가 볼 수 있었던 걸까?
같이 한번 알아볼까요?
2. 조선왕조실록은 누가 썼을까? 작성자와 제작 과정 총정리
조선시대에는 사관(史官)이라는 공식 기록 담당자가 있었습니다. 춘추관에 소속된 관리로서, 사관은 매일 왕의 언행을 실시간으로 기록했습니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이나 조정의 논의도 함께 기록했죠. 이 기록을 '사초(史草)'라고 하는데요, 바로 이 사초가 실록의 토대가 됩니다.
왕이 죽으면 실록청 (實錄廳)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사관들이 남긴 사초와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같은 국가 문서를 모아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습니다. 실록 편찬은 여러 명이 나누어 작업했으며 1~2년 이상 소요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의 생전에 쓰인 사초를 바탕으로 사후에 편찬된 기록입니다.
3. 왕의 말이 실록에 실시간처럼 적힌 이유는?
사관들은 왕이 있는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왕의 말과 행동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언행을 실시간으로 적었으며,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이나 조정의 논의도 기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는 이 사초를 참고했기 때문에, 마치 실시간 기록처럼 보입니다. 덕분에 "몇 월 며칠, 왕이 이런 말을 했다" 같은 기록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4. 조선왕조실록은 왜 만들었을까? 유교 국가의 기록 정신
조선왕조실록을 만든 목적은, 왕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객관적으로 기록해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선대의 기록을 ‘거울처럼 삼아라’는 의미도 있었는데요,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사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후세 왕들이 과거를 거울삼아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왕과 신하들의 기록을 실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이념적으로는 사필귀정, 즉 모든 일은 결국 바르게 돌아간다는 유교적 믿음이 바탕에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은 후대에 역사적 사실을 남기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
5. 왕도 못 본 조선왕조실록? 이유와 실제 사례 정리
왕들도 실록을 보지 못했냐고요? 네, 정말로 그랬습니다. 왕은 자신의 면전에서 작성되는 사관들의 사초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역사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관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요.
이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상대적으로 왜곡이 적은 역사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 계속 기록하는 것이 왕의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태종은 사관에게 지금 뭘 적고 있느냐며 사관을 직접 불러서 추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초를 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이 기록조차 실록에 남게 됩니다.
세조는 자신에 대한 기록이 불리하게 남는 걸 원치 않아서 실록의 내용을 검토하고 수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정조도 사초 기록을 가져오라고 했다가 기록이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그래, 이래야 실록이 신뢰받는 것이지, 라며 수긍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열람 금지 원칙은 재위 중인 왕 본인의 기록 뿐만 아니라 선대 왕의 실록에도 동일하게 적용됐습니다. 그래서 왕은 선대 왕의 실록도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왕 뿐만 아니라, 누구도 보지 못했죠.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솔직하고 상세한 기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공식적으로 깨진 사건이 한 번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 때입니다.
연산군은 금기로 여겨졌던 사초를 직접 열람했습니다. 이는 유교적 정치 질서와 사관의 독립성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사건이었죠.
당시 그는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글이 세조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연산군은 격노했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훈구파와 함께 이를 역모로 몰고 갔고, 사초에 이 글을 실은 사관 김일손이 주도자로 지목되어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 이 사건은 사림 세력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확산됐고, 여러 인사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1498년)입니다. 무오사화는 사림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의 시작이자, 사초 작성이라는 제도 자체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6. 조선왕조실록, 모든 사건을 담고 있을까? 기록 범위 알아보기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 뿐만 아니라, 왕의 건강상태, 날씨, 신하들과의 논쟁, 정치적 결정 과정 등을 포함합니다. 정치, 군사, 외교, 과학, 자연재해, 왕실 행사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죠. 크고 작은 사건을 모두 기록하려 했고, 심지어 일상적인 말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일까지 전부 기록된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는 생략된 경우도 있습니다. 사관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중심으로 선별해서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은 중요한 정치, 사회적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필요에 따라 왕의 일상적인 행적도 남아 있다고 보면 됩니다.
7. 조선왕조실록은 한자로만 쓰였을까? 한글 기록은 없었나?
조선왕조실록은 전부 한자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공식 기록문서는 한문이 기본이었고, 한글로 쓰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단, 실록 이외의 다른 사료, 즉 승정원 일기 등에는 한글 문서도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8. 조선왕조실록, 유실된 기록도 있을까? 전란 속의 보존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은 완벽하게 보존된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훼손되거나 사라진 부분도 있습니다.
조선 초창기에는 실록을 춘추관이나 임시 장소에만 보관하다가 세조 들어서 실록 보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같은 실록을 4벌 제작해 4곳의 사고(史庫) 에 분산보관하기 시작했습니다.
📍 대표적인 4대 사고:
① 춘추관(한양)
② 충주사고
③ 성주사고
④ 전주사고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실록을 보관한 사고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왜군이 한양 이남 지역을 휩쓸며 각지의 사고를 불태웠던 것이죠.
이 와중에도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들은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실록은 784권에 달했다는데요, 지방 유생과 승려들 30여명이 실록을 지키기 위해 전주사고본을 내장산으로 옮겼고, 1년 동안 보관되다가 다시 정읍, 태인, 익산, 부여, 청양, 아산, 강화도 등을 거쳐 1603년에 묘향산 사고에 보관됐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의 노력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주사고본 자체도 일부는 전란 중에 훼손되거나 누락됐기 때문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실록, 즉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은 조선 후기 광해군때에 승정원 일기와 개인 문집 같은 다른 문헌 자료를 참고해 보완해서 복원됐습니다. 하지만 100% 완전히 복원되지는 못했습니다.
9. 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음력? 양력? 어떻게 읽어야 할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날짜별로 일어난 일들이 기록돼 있는데, 이 날짜는 전부 음력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음력(태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실록의 날짜를 계산할 때는, 음력을 양력으로 변환해서 보아야 합니다.
10. 조선왕조실록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열람 가능한 곳 정리
현재 조선왕조실록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기록원 등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목판 인쇄본이었지만,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번역판 보는 법도 궁금하시죠?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각 페이지마다 한문 원문과 함께 번역된 현대어 해석본이 제공되고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원문과 번역본 보러가기
직접 실록 원문을 읽는 게 조금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제가 연재중인 [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시리즈]도 함께 참고해보세요. 실록 내용을 하루치씩 쉬운 말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한 글입니다.
현재는 연산군일기부터 시작했고, 앞으로 차근차근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시리즈 보러가기
11. 북한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묘향산 사고 이야기
네, 북한에는 현재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조선왕조실록의 일부가 보관돼 있습니다. 원래는 묘향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들이죠.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다 타버리면서 큰 충격을 받은 조선의 조정에서는 실록 보관 장소를 산 속 깊은 곳에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고 5곳이 만들어졌습니다.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사고인데요, 평안도 향산군 보현사 안에 설치된 묘향산 사고의 실록들 중 일부가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실록 등이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12. 조선왕조실록의 동그라미(ㅇ) 기호, 무슨 의미일까?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동그라미 기호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글자생략 기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왕이나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가리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반면, 현대 디지털판에서 보이는 동그라미는 생략된 글자나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실록에는 날짜별로 왕의 행적이나 국가의 사건이 기록되는데, 각 에피소드가 이어질 경우,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할 때 동그라미를 사용했습니다. 문단을 나누는 개념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셈이죠.
13. 일제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없애지 않았을까?
일제는 조선의 지식과 문화를 철저히 조사하고 통제하려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체성과 국가 운영의 핵심을 보여주는 자료였으므로, 일제는 오히려 정복자의 시선으로 실록을 연구하고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정복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배의 도구로 삼기 위해 노력했죠.
지금도 몇몇 실록은 일본 도서관, 궁내청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2006년 그 중 일부가 한국으로 반환되었습니다.
14. 조선왕조실록에도 오타가 있을까? 기록의 완벽성과 오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는 수십 명의 사관이 검토를 하면서 철저히 교차 검증 작업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었기에 소수의 잘못된 기록나 중복, 생략 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같은 사건이 다른 실록에서 다르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후대의 연구자들이 일부 오류를 발견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국사편찬위에서는 이런 오류에 대해 주석을 달거나 수정본을 추가하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15. 조선왕조실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유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역사서라서가 아닙니다. 기록 방식, 철학, 규모, 보존 체계 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① 체계적이고 철저한 기록
-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25대 왕, 472년간의 통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왕의 언행, 정치 회의, 기후, 재난, 일상생활까지 총망라했습니다.
- 이렇게 연속성 있고 객관적인 국가 기록물은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② '왕도 볼 수 없었던' 독립적 기록 시스템
- 조선왕조실록은 왕조 국가임에도 실록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했습니다.
- 왕조차 사초나 실록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어서, 왜곡이 적고, 신뢰도가 높은 역사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③ 방대한 분량과 기록 기술
- 총 1,893권 888책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권'은 사건, 연도 별 내용 단위, '책'은 실제 제본 단위)
- 목판 인쇄라는 고도의 기술력으로 제작
-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는 등 보존 시스템도 체계적이었습니다.
④ 유교 국가의 철학이 담긴 기록 문화
-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 왕이 거울로 삼을 수 있도록 구성된 '정치의 교과서'였습니다.
- '기록은 곧 정치의 거울'이라는 유교 국가의 역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⑤ 우수한 보존 상태와 디지털 접근성
- 전쟁과 재난을 거쳐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은 현재까지 양호하게 보존돼 있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디지털화까지 완료해서 일반인들도 원문과 번역본을 쉽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신뢰성 높은 국가 기록물 중 하나로, 기록 문화와 제도적 독립성을 함께 갖춘 역사적 유산입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등재명은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입니다.
📌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국가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조선왕조실록" 을 검색하시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사회의 철학과 시스템, 그리고 기록에 대한 집념이 담긴 결과물이자,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방대한 기록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을 더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과거의 문서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기록이라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쯤은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 들어가서, 과거 어느 날의 기록을 직접 펼쳐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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