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실록실록

숭은전, 세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 예종실록 속 광릉 이야기

사관 2호 2025. 5. 16. 07:08
Contents 접기

1469, 세조의 어진을 모신 광릉 영전이 '숭은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정치적 상징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종 실록 5권에 기록된 예종 즉위 원년 5월 16일의 한 줄을 들여다 봅니다. 

 


1. 오늘의 실록 한 줄

 

📜 “광릉의 영전을 ‘숭은전’이라 부르게 하소서.”
—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5월 16일(음력)

 

 

2. 1469년, 광릉의 영전을 숭은전이라 부르다

 

1469516일, 양력으로 614일에 이조(吏曹)에서 조정에 건의했습니다. 

광릉(光陵)의 영전(影殿)숭은전(崇恩殿)’이라 부르게 하소서.”

예종은 이 요청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단 네 줄 남짓한 짧은 기록이지만, 이 속에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 위계, 정치적 상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3. 숭은전이란? 세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광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합장릉입니다. 

이곳에 지은 숭은전은 세조(수양대군)의 초상화(어진)를 모신 전각이었습니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그의 묘역 근처에 영전이라 불리는 전각을 지어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요, 1469 이 영전을 공식적으로 숭은전’(崇恩殿, 은혜를 높이 받든다)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 숭은전은 세조의 위업을 기억하고, 예우를 공식화하는 정치적 상징 공간이었습니다.

 

 

4. '숭은전' 명칭의 정치적 의미는?

 

당시 조선 왕실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이 이름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정통성 강화 :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왕실은 세조를 향한 예우를 명확히 하려 했습니다.
  • 유교적 예제 확립 : 조선은 유교국가로서, 왕의 어진을 모시는 전각에도 적절한 이름과 의례를 부여해야 했습니다. ‘숭은은 공경과 은혜를 모두 표현한 이상적인 표현이었습니다.
  • 예종의 효심 : 1469년은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즉위한 해였습니다. 이 전각 명명은 단순 의례가 아닌 왕위 계승자의 효심과 정치적 행보로도 읽힙니다.

 

5. 숭은전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 사라진 조선의 전각

 

지금 광릉에는 숭은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고, 지금은 기록과 지명에만 전해집니다. 

남아 있는 것은 능묘(광릉), 정자각, 수복방 등 왕릉의 핵심 시설뿐입니다. 

즉, 숭은전은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일시적 제향 전각으로, 지금은 역사 속 이름만 남은 유적입니다. 

 

 

6. 짧은 실록 기록에 담긴 조선 왕실의 기억법

 

왕릉 근처 전각의 이름을 하나 바꾼 일.

겉보기엔 사소해 보여도, 그 안에는 정통성의 고민, 예를 통한 정치적 상징화, 조선 왕실의 기억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