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7년, 연산군 재위 3년. 어느 날 조정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 '인정전'에 뜻밖의 손님 세 마리가 출현합니다. 바로 양이었죠. 오늘은 연산군과 '양 세 마리 사건'에 얽힌 실록 기록을 살펴보며, 조선 궁궐 속 아주 엉뚱한 하루를 들여다봅니다.
1. 오늘의 실록 기록
양 세 마리가 풀어져 인정전(仁政殿)에 들어왔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전정(殿庭)은 조정 백관이 우러러 보는 곳이요, 양을 기르는 곳은 따로 있는데, 맡아 지키는 자가 조심하지 않아 놓여 나오게 하였으니, 통절하게 징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양을 알지 못하므로 보려고 한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놓아 주었다.
- < 연산군 일기> 23권, 연산군 3년 5월 17일 (음력)
2. 실록 현대어 해석 및 요약
연산군 3년 5월 17일 (음력) 은 양력으로 따지면 1497년 6월 20일입니다. 연산군 일기에 기록된 이 내용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
양 세 마리가 인정전(仁政殿)에 들어왔습니다.
승정원에서 "전각(殿閣) 앞마당은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우러러보는 엄숙한 공간인데, 양을 기르는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음에도 이를 관리하는 사람이 제대로 살피지 않아 양들이 풀려나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자를 엄중하게 징계해 주시옵소서." 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연산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양을 알지 못하므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는 곧 풀어주게 했습니다.
- 사건 : 궁궐 안의 핵심 공간, ‘인정전’에 양 세 마리가 들어오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 조정의 반응 : 승정원은 “중대한 실수”라며 관리들의 책임을 물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연산군의 반응 : 오히려 “내가 양을 본 적이 없어서, 보려고 했던 것뿐”이라며 책임을 묻지 않고 양을 풀어주도록 명했습니다.
3. 용어 설명
-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중심 전각. 국왕이 신하들과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거나 정사를 보는 공간.
- 승정원(承政院) : 국왕의 비서실 격인 기관으로,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각종 업무를 관리함.
- 전정(殿庭) : 전각의 앞마당으로, 가장 신성하고 엄숙한 공간 중 하나. 특히 정전의 앞마당은 조정 백관들이 줄지어 서는 자리.
4. 기록의 의미 (흥미로운 포인트)
조선 궁궐에서 양을 기른다고?
궁궐 안에는 실제로 다양한 가축을 기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의약용이나 제사, 혹은 보신을 위한 목적으로 양이나 사슴, 돼지 등을 따로 키우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연산군은 궁궐 내에서 다양한 동물들을 기른 것으로 유명합니다.
동물에게 직접 먹이를 주거나, 동물 구경을 위해 신하들에게 보고서를 쓰게 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연산 4년에는 사슴이 궁궐 내에 들어오자 “귀한 동물이니 가까이 보자”고 말하며 가까이서 구경한 기록도 있습니다.
양이 인정전에 들어온 사건을 기록한 이날의 실록은, 왕의 사적인 호기심과 동물 애호가적인 성향이 반영된 궁궐 풍경이었던 셈입니다.
연산군, 의외로 인간적인 모습
이 기록이 적힌 당시는 연산군이 비교적 안정된 국정 운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내가 양을 본 적이 없어 보려 한 것뿐”이라며 관리를 감싸주는 모습은, 잔혹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연산군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엄숙한 궁궐에 불쑥 들어온 동물
엄격한 위계와 격식이 중시되던 조선 궁궐에서, 양의 출현은 그 자체로 큰 소동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왕은 가볍게 넘겼습니다.
당시 상황의 긴장도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이 기록은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당시 연산군의 캐릭터, 궁궐의 구조, 조선 시대의 동물 관리까지 보여주는 ‘작지만 풍성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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