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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 연산군 1년 Day3 - 불교 의례 논쟁과 신하들의 반발

사관 2호 2025. 4.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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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한 줄 한 줄, 쉽고 꼼꼼하게 풀어보는 시리즈'입니다. 연산군 일기부터 시작하는데요, 오늘은 즉위년 3번째 날의 기록을 들여다봅니다. 전날부터 이어진 연산군의 식사 문제, 불교 의례 논란, 신하들의 상복 착용 논쟁까지,  격렬한 논쟁이 오간 하루였습니다.  
 

1. Day 3 - 같은 듯, 다른 논쟁

 
연산군과 신하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격렬한 의견 차이가 드러납니다. 언뜻 보면, "똑같은 얘기를 왜 이틀 내내 하고 있지?" 싶지만, 이는 당시 조선 조정에서 '어떻게 합의를 이루어갔는지', 그 과정을 엿보게 해줍니다.
 

 


2. 실록 내용 쉽게 읽기

 

🖌 조선 국상 중 연산군의 식사 - 유교 예법을 따를 것인가? 

 
이날, 승정원(承政院)에서 연산군에게 세종 대왕의 뜻을 따를 것을 권유했습니다.

 

국상 중 사흘이 지나면 밥을 먹어야 한다 (세종)

연산군 : “이미 죽을 먹었으니, 성빈(成殯, 장례 절차의 일부)이 끝난 후에 밥을 먹겠다"
신하들 : “세자께서 식사를 거부하시면, 왕비 또한 식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교를 어기지 마시고 왕비를 위해서라도 드십시오.”
연산군 : “선왕의 유교가 중요하니, 어쩔 수 없이 따르겠다.”
 
결국 거절하던 연산군은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밥을 먹기로 결정했습니다.

 

 

🖌 조선 왕실 불교 의례 논쟁 - 연산군 vs 신하들 

 
국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교 의례를 거행할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 사헌부와 사간원 :
“불교 의례는 허황된 것이며, 조선은 유교 국가이므로,  새로운 정치의 시작에 누가 될 것입니다.”
“대행왕(성종)께서는 평생 불교를 믿지 않으셨으므로, 유교 예법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 연산군 : 
“조선 왕실이 불교 의례를 지킨 것은 불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통을 존중한 것이다.”
“성종께서도 선왕을 위해 불교 의례를 감히 폐하지 않으셨다. 나도 따를 것이다.”
 

📌 추가 정보

전날에 이어, 이날도 불교 제례를 반대하면서 논의가 오가는데, 반대하는 주체는 '사간원'과 '사헌부'입니다. 이 두 기관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언론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헌부 :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국왕을 포함한 모든 신하의 잘못에 관해 직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 사간원 국왕에게 직언하고 올바른 정책을 제안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 사헌부와 사간원은 무슨 권리로 계속 반대하나? 

이들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국정을 비판하고 바로잡을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국왕이 잘못된 정책을 펼칠 때 이를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거듭 상소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불교 의례를 행하는 것은 유교의 대의와 유교적 장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그것을 막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 국왕의 장례는 모든 신하와 백성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불교 의례를 허용하는 것은 조정의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흔드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특히 연산군은, 불교를 좋아하고 사찰을 후원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런 연산군의 성향이 강화될 경우, 성리학을 근간으로 삼는 조선의 기본 체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더 끈질기게 반대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연산군에게 불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 신하들의 상복 논쟁 – 유자광의 사례

 
유자광은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성종의 국상에 따라 국왕의 상복을 입겠다고 청원했습니다. 연산군은 예조가 판결한 일에 대해, 승정원에 다시 묻게 합니다.
일부 신하들은 “국가에 일이 있을 경우, 상중인 자라도 관직에 복귀하여 국왕을 보필해야 한다.”라며 유자광의 요청이 '의'에 해당하니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예조의 판결을 따르자는 신하의 요청에 연산군은 “유자광의 정성은 가상하나, 국가의 법이 있으니 예조의 판결을 따르라.”고 합니다.
 

📌 추가정보

상복과 관련한 논의는 예조에서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승정원에 다시 묻게 한 것은, 예조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 예조란?

- 예조 : 제례, 의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한 부서로, 특히 의례와 관련된 해석과 집행을 담당했습니다.
- 의례나 제사, 국가 행사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는 예조가 공식적인 해석을 내리고 답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조정 내에서 예조의 해석이 모든 신하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조가 내린 답변이 특정 학파나 이해관계에 치우쳐 있다고 판단될 경우, 다른 신하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논쟁을 했습니다.
특히, 성리학 내부에서도 학파가 달랐고 해석 방향이 달라서, 각각의 학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해석에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 조선은 공론의 나라였다!

조선의 정치 체제는 단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논쟁을 통해 합의된 공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론, 즉 신하들 간의 합의된 의견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조가 답을 내놓아도, 그것이 공론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끝없이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이는 국왕이 어떤 사안에 관해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견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  연산군의 곤란한 명령 - 따르지 않는 신하

 
홍문관과 예문관 대신들이 연산군이 불교 의례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중들이 장막을 쳐놓고 영가(靈歌)를 외쳐 부르면, 하늘에 계신 대행왕의 신령이 반드시 크게 진노하실 겁니다."
"대행왕이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좋아하지 않으시던 일로 명복을 비는 것을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승하하신지 얼마 안 되어 모두가 어쩔 줄 몰라 애통하고 분주한 이때에,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절에 재를 지낸다면, 하늘에 계신 혼령이 불쾌하실까 깊이 염려됩니다."
 
이런 가운데, 연산군은 홍문관의 손주라는 대신에게 소문, 즉 불교식 공덕을 빌며 올리는 글을 써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손주는 명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손주 : "몸담고 있는 홍문관에서도 반대하고, 저 또한 그릇된 일인줄 알고 행한다면 제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연산군 : "두 번이나 명령을 받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두겠다는 건가?"
대신들 : "마음과 행동이 다른 일을 할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니, 오만하다 생각지 마십시오."
연산군 : "윗대에서도 재를 지냈으니, 얼른 지어서 바치도록 하라."

 

🖌 국상 기간 중 발생한 지진
 

이날, 충청도 면천, 서산, 당진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
- 당시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국가의 변화와 연결해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지진은 불길한 징조로 해석됐을 지도 모릅니다.

 

 

3. 정리 - 정치적인 힘겨루기의 시작

 
1494년 12월 27일의 기록을 통해 드러난 것은, 연산군의 통치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유교 예법을 따르려는 신하들과 불교 의례를 유지하려는 연산군 사이의 긴장감은, 그저 형식상의 갈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 겨루기였음을 보여줍니다. 

연산군은 이제 막 즉위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를 쉽게 거스르지 못하지만, 불교 의례를 고집하는 모습에서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또한, 유자광의 상복 논쟁과 식사 예법에 대한 태도를 통해, 효심을 내세우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법을 해석하는 독자적인 성향도 드러납니다.

불교와 유교의 끊이지 않는 논쟁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다음 실록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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