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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 연산군 1년 Day5 - 연산군, 진짜 왕이 되는 날!

사관 2호 2025. 4.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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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한 줄 한 줄, 쉽게 풀어보는 시리즈', 오늘은 『연산군일기』 1년 12월 29일 기록입니다.  이날은 연산군이 왕으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 날입니다. 이날의 연산군 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왕의 취임식 현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Day 5 -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즉위식 전과정

 
연산군이 진짜 왕이 된 날, 사면령을 내리고, 대보(大寶)를 받는 의식을 치르고, 첫 교서를 반포하는 과정이 모두 진행됐습니다. 즉위식을 앞드고는 '사면령'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도 벌어졌습니다.
 
이날의 실록은, 연산군이 진짜 ‘왕’으로서 첫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연산군 즉위년 12월 29일은 이 해의 마지막 기록이기도 한데요, 조선은 양력이 아닌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해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짜가 달랐습니다. 이 해(연산군 즉위년)는 윤달 없이 12월이 29일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실록도 12월 29일까지만 기록된 것입니다. 
 
 

 
 


2. 실록 내용 쉽게 읽기 - 연산군 1년 12월 29일

 
 

🖌 사면령을 내리다

 
승정원에서 예전 왕들이 즉위했을 때 사면령을 내렸던 예를 정리해서 보고했습니다.
 
연산군 : “성종(대행왕) 때 했던 방식 그대로 따르라.”
정승들 : “전하, 원래 정속된 사람들은 관청의 노비로 삼거나, 또는 역참 인력으로 써서 국경지역과 교통망을 유지하는 데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들까지 모두 풀어주면, 국경과 공문서를 전달하는 도로망이 텅 비게 되어 국가기능이 약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생각엔 정속된 사람들(관노, 역자)들은 석방해서는 안 되고, 충군된 자(죄를 지어 군에 가는 형벌을 받은 사람들)만 석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성종께서는 방계에서 즉위하셨기에 특별히 백관들에게 계급 하나씩을 올려주셨지만, 전하께서는 직계이시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연산군 : “군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죄의 무게를 따지지 말고 다 풀어주고, 나라에 소속되어 일하던 노비나 역참 일꾼들은 석방하지 말라. 그리고 관리들에게는 따로 계급을 올려주지 말라.”
 

📌 추가정보 :

왜 방계 출신인 성종은 관리들에게 계급을 올려줬고, 직계 출신인 연산군은 그런 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고 했을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조선 시대의 왕위 계승 원칙과 정치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  방계와 직계란?

- 방계(傍系): 왕실의 ‘곁가지’. 즉, 왕의 직계 아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조카 등 먼 혈통에서 왕위를 이은 경우.
- 직계(直系): 전임 국왕의 아들, 즉 정통 혈통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

조선에서는 직계-직계 계승을 가장 이상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으로 여겼습니다. 


💡 성종이 방계라고?

성종은, 세조의 첫째 아들 이장(의경세자)의 아들로, 태생으로만 보면 '직계 혈통'이지만, 실제로는 '방계'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위가 삼촌인 예종에게 먼저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예종이 다시 1년만에 요절하자, 왕의 조카였던 성종이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조선의 왕실 내부에서는 이것을 '정통 직계 승계' 가 아니라 '우회된 방계 계승 구조'로 해석했습니다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고 왕위도 할아버지를 거쳐 삼촌을 지나 다시 성종에게로 돌아온 구조였으니까요. 
실록에서 성종을 "방계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반면,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명백한 직계혈통이었습니다. 


💡 방계와 직계는 왜 관리들에게 주는 혜택이 달랐을까?

방계 출신이 왕이 되면, 정통성이 약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신하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계급'을 올려주는 일종의 특혜를 줬습니다. "내 편이 되어줘서 고맙다"는 의미의 보상이었던 셈이죠. 

이에 비해, 직계 혈통은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따라서 굳이 관리들에게 계급을 올려주며 충성심을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 추가정보 :  

* 역자 / 역참인력이란? 

조선에는 ‘역(驛)’이라는 거점 시설이 있었습니다. 도로망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교통, 통신 거점 시설로서, 관리들이 지방에서 한양까지 여행하거나 공문서를 전달할 때 말을 갈아타는 중간 기착지였죠.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 우체국 + 숙소 + 정류장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역부(驛夫)’, ‘역졸(驛卒)’이라고 불렸고, 이들을 통틀어 ‘역자(驛子)’ 또는 '역참 인력'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말을 몰고 다니며 공문서를 빠르게 전달하거나 관리의 이동을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 충군된 자 vs 정속된 자 :

충군된 자는, 죄를 짓고 군대에 끌려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 정속된 자는 신분이 고정된 사람, 즉 관노나 역자처럼 국가의 업무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 사면령은, 죄인을 풀어주는 목적이기 때문에 충군된 자들을 정상적인 사면 대상. 
- 관노와 역자는 노동력의 핵심 인프라이자 국가 시스템을 떠받치는 고정 인력.
- 이들을 석방하면 공공 서비스 마비, 지방 교통망 붕괴, 군사적 경계 약화라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음.

 
 

🖌 왕실은 수륙재(불교 의식)를 지내게 하고, 유생들은 곡하러 모여들다

 
연산군은 승지 송질을 시켜 장의사(절)에서 수륙재를 지내도록 명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과 사학 유생들이 대궐 문 밖에 모여 곡을 하며 애도했습니다.
 
 

🖌 왕이 되는 순간 - 연산군의 즉위식

 
오후 1시-3시 사이, 왕세자와 왕자들, 종친들과 문무백관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조문하러 들어왔습니다. 
제관이 술을 따르며 제사를 올리자, 왕세자와 일행은 다시 여차(임시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왕비와 세자빈, 내외 명부들도 예법에 맞춰 상복을 입고 절차를 마쳤습니다. 
 
도승지가 유언이 담긴 문서(유교문)를 궁궐 남쪽에 정중히 놓고, 상서원 소속 관리가 그 옆에 대보(大寶)를 함께 올려두었습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예복을 차려입고, 정해진 자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먼저 좌의정 노사신이 빈전(조선 시대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임시로 모셔두는 장소)의 동남쪽 모퉁이로 가서 엎드려 조문을 드렸습니다.
왕세자(연산군)는 상복을 벗고, 식으로 왕의 예복인 면복(冕服. 대례복) 갖춰 입고 나왔습니다.
 
의전 담당자인 좌통례가 왕세자를 궁궐 동쪽 문을 통해 안내하고, 왕세자는 예법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사신(思愼 : 의식을 담당하는 관리)이 대보를 받들고 나와 왕세자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자, 왕세자는 꿇어앉아 직접 대보를 손에 들고 이를 다시 근시(近侍 : 자신을 보좌하는 측근 시종)에게 건넸습니다. 
그 후 자리에서 물러나 네 번 절을 한 다음, 서문을 통해 나갔습니다
 
왕이 인정전 처마 아래에 자리 잡고 앉자, 문무백관들이 차례로 절을 올리며, 즉위를 축하하는 인사(하례)를 드렸습니다.
하례가 끝나자 왕은 다시 여차(임시숙소)로 돌아가 예복을 벗고, 아버지의 상중에 맞게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종친들과 백관들도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 추가정보 :

* 왕에서 왕세자로 호칭이 바뀌는 순간

연산군이 대보를 받은 이후 실록에서는 '왕'으로 호칭됩니다. 이 장면은 왕권이 대보 수여와 함께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보란 무엇인가’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조선시대 의례에서 '방향'의 중요성 ?

연산군의 즉위식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방향이 유독 강조돼 있습니다. 왜일까요?
조선의 궁중 의례에서는, 동서남북의 위치 하나하나에까지 정해진 예법이 있었습니다. 

왕은 동쪽에서, 신하는 서쪽에서 입장하는 방식으로 위계를 표현했죠.
대보를 남쪽에 놓는 건, 가장 존귀한 것을 의식의 중심에 둔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즉위 후 처음으로 내리는 사면령이 전국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연산군의 첫 번째 교서가 낭독됐습니다. 
 
📜 연산군의 첫 교서 내용

우리 아버지 성종께서는 총명하시고 근면하셔서 26년 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셨다. 학문과 유교 문화가 널리 퍼졌고, 군사적으로도 큰 업적이 있었다.

백성은 편안했으며 물자도 풍족하여 그 은혜가 온 나라에 널리 퍼졌도다. 예절과 문물은 제대로 갖추어졌고, 음악은 조화를 이루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그 업적은 너무나도 높고도 넓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큰 복을 누리시리라 믿었건만, 갑자기 돌아가시니 애통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 왕위를 잇는 것이 몹시 두렵고 민망하나, 국정을 오래 비워둘 수 없기에 부득이하게 오늘 창덕궁에서 즉위한다. 이에 인수대비와 인혜 왕대비를 각각 대왕 대비로 올리고, 성종의 왕비는 왕대비로, 나의 부인 신씨는 왕비로 책봉한다.

왕위를 잇는 이 시점에서 은혜를 베풀고자 대사면을 내리니, 모반·대역 등 몇 가지 큰 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죄를 용서한다. 사면령 이전의 일을 두고 남을 고발하는 사람은 벌하고, 빼앗은 직첩은 돌려주며, 유배나 군역형에 처해진 이들도 모두 풀어주노라.


선왕들께서 이제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으니, 깊은 못에 다가가는 듯,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두렵다. 신하들의 도움으로 반드시 태평한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

 
 

🖌 유생들의 상소 – 불교 의례, 그건 아닙니다

 
성균관 유생 조유형 등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행대왕께서는 유교를 숭상하시고, 불교를 멀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재를 지내는 일도, 무속행위도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헌데 이제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다시 불교의례를 지내시겠다고요? 부처에게 복을 빌면 선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조선의 교화도 무너집니다.

공자께서도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고치지 않아야 효도’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정치하는 이 시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발 선왕의 뜻을 따라 주십시오.

 
하지만 연산군은 “예전 조종조 때부터 하던 일이니 그냥 시행하라.” 고 짧게 답하며,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성균관 유생의 상소문 전체 보기 (클릭하면 접힌 내용이 아래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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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아룁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지극한 인덕으로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 덕은 마치 하늘과 땅이 백성을 감싸듯, 또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따뜻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어 신하들을 버리고 떠나시니, 깊은 산골에 사는 무지한 남녀들조차 모두 부모를 잃은 것처럼 울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처럼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셨으니, 모든 정치는 처음 시작이 가장 중요합니다. 백성들은 슬퍼하다가 이제 눈물을 닦고, 새로 펼쳐질 정치가 어떤 모습일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전하께서 선왕의 복을 빌기 위해 절에서 부처에게 재를 지내려 하신다 하니, 저희는 깊이 마음이 아픕니다. 선왕께서는 이미 그 복이 하늘처럼 크셨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런 분께 재를 지내 복을 빌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그런 행위는 선왕께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서경》에 이르길,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니 스스로 올바른 길을 닦아야 한다 하였고, 《시경》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면 옛 법도를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린 임금 중 처음을 바르게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시작을 잘하는 방법은 곧 선왕의 방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이단인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셔서, 축수 재(불교 제사)나 도승 같은 것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까지 유교적 예절을 따르게 되었고, 고려 말기처럼 부처에게 빌거나 요사스러운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전하께서 이제 막 즉위하신 이 시점이, 백성의 마음과 나라의 기강을 잡을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선왕이 정립해 놓은 바른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백성들도 부끄럽게 여길 만한 일입니다. 저희는 전하께서 그런 일을 하시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선왕께서는 불교가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여기셔서, 재위 26년 내내 이를 배격하셨습니다. 많은 불교 승려들이 환속(속세로 돌아감)하여 일반 백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다시 흙과 나무(부처상)에 의지해 복을 빌겠다고 하시니, 천지신명도 이를 안타깝게 여길 것이며 백성들도 마음 아파할 일입니다.

이런 행위는 선왕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시 미신에 빠지도록 문을 열어주는 셈입니다. 공자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 3년 동안은 그 뜻을 바꾸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선왕이 돌아가신 지 열흘도 안 되어 선왕의 방침을 바꾸시려 합니다. 이런 모습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 정치의 근본을 바로잡으시고, 선왕께서 이룩한 바른 교화를 이어가셔서 백성들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 성종의 죽음, 의원 탓인가?

 
정언 이의손이 또다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의손 :
“밖에서는 이런 말이 돌고 있습니다.
‘성종께서 종기를 앓으셨는데, 의원 송흠과 김흥수가 제대로 진찰도 안 하고 약을 잘못 써서 돌아가셨다.’
세종 때도 약을 잘못 썼던 의원들이 중벌을 받았는데, 이들도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산군 :
“아버지께서는 약을 잘 아셨기에, 의원이 올린 처방을 스스로 검토하셨고, 복용도 직접 판단하셨다.
병세가 심해지기 전까지는 의원도 부르지 않으셨다. 의원들이 제멋대로 한 것이 아니다.
정말 책임을 묻자면 무거운 벌을 내려야 하겠지만, 애매한 벌은 줄 수 없으니, 정승들과 다시 상의하겠다."
 

📝 '책임 추궁'보다는 '억울한 처벌 방지'를 선택한 연산군 
: 이 장면에서는 합리적이면서도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 유언에 따라 정승들을 곁에 두기로 함

 
승정원에 또 한 가지 명이 내려졌습니다. 
 

대행대왕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나도 처음 즉위할 땐 원상(보좌하던 대신들)이 있었으니, 너도 처음에는 정승들로 하여금 자주 승정원에 앉아 국사를 함께 의논하게 하라’ 하셨다. 
그러니 그 유언대로 시행하라.

 
 

🖌 대간의 항의

 
대간(장령)강백진과 이의손이 다시 항의했습니다. 
 
“어제 수륙재 문제로 아뢰었을 때, 전하께서 대간의 의견은 올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대간은 조정의 귀와 입인데, 저희 말을 듣지 않으시면 백성들의 고통을 전할 수 없습니다.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은 선왕을 위한 일이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는데 감히 또 토를 다니, 아뢰지 말라고 한 것이다.”
 
 


3. 정리 - 연산군, 왕으로서의 첫 걸음

 
이날은 연산군이 즉위식을 거쳐 진짜 ‘왕’으로 거듭나는 날이었습니다. 대보를 받는 장면, 백관의 하례, 첫 교서, 대사면, 그리고 불교 의식 논란까지... 왕이 된다는 것이 단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연산군 즉위 2년의 첫날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한 줄 한 줄 읽기 | 연산군 2년 Day1 - 대간과의 첫 충돌, 정진 사건과 소금 논쟁

오늘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2년 1월 1일자 기록을 살펴봅니다. 연산군이 즉위한 지 하루 지난 날, 첫 국정 운영에서 대간과 충돌하는 모습이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연산군 통치 시기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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